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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9-09 17:34
[문썬/용별] 연애 말고 결혼 : 의심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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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37  

문썬팬픽/용별팬픽

연애 말고 결혼 : 의심 (上)

w.라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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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오락가락한 날씨 때문인지, 별이의 귀가시간 역시 오락가락이었다. 출연하는 드라마 장르 특성상 야외 촬영이 대부분이었는데, 하늘이 하루 종일 맑게 개어있다가도 어느 순간 비가 쏟아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다가도 촬영이 불가능할 정도의 햇볕이 내리쬐었다. 씬이 많지 않은 조연이라 안 그래도 긴 별이의 대기시간은 제멋대로인 날씨 탓에 연장에 연장을 거듭했다. 그런 별이를 집에서 기다리는 용선의 대기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일찍 끝날 것 같다던 별이의 말에 신이 나서 차린 저녁을 결국 혼자 먹게 된 날을 세어 보면 벌써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촬영 시간이 워낙 들쭉날쭉이라 잠들 땐 비었던 옆자리가 아침이면 별이로 채워져 있기도 했고, 반대로 아침에 눈을 뜨면 옆에서 잠들었던 사람이 어느새 사라져있기도 했다.

사실 그 모든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용선을 화나게 하는 건 별이의 잦은 외박이 오롯이 촬영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별이와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중견배우 명환은 소문난 애주가였다. 오랜 대기 시간과 격렬한 액션신에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온 별이를 불러내는 명환의 전화에, 별이는 매번 거절하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어쩔 수 없었다. 명환이 주연배우인 주한까지 구십 도로 인사할 정도의 대선배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건 명환이 다양한 분야에 수많은 연줄을 지닌 이른바 '인맥왕'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프로듀서 출신 삼선 국회의원이었고, 그의 장인 역시 한때 정치계에 몸담았던 대기업 고문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로 작품에 캐스팅되거나 캐스팅이 불발된 배우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별이가 그나마 멀쩡한 상태로 귀가했던 날도, 명환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서면 매번 술에 잔뜩 취해 돌아왔다.

어제도 그랬다. 촬영 일정상 2박 3일간의 의도치 않은 휴가를 얻어 집에 온 별이가 샤워를 마치고 나와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이가 집에 간 걸 알게 된 명환이, 저도 촬영이 일찍 끝났으니 술 한잔하자고 불러낸 것이다. 이번엔 거절하면 안 되냐는 용선의 말에, 별이는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환이 그의 부름에 거절한 배우와 스태프들을 향해 경력단절에 대한 협박에 가까운 으름장을 놓는 걸 수차례 목격했다. 그의 협박성 비아냥을 견디지 못해 다음 술자리에 참석하면, 명환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그를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건 괜찮지만 제 발로 걸어들어오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는 용선의 당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의 부름에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용선은 새벽 세 시가 되도록 귀가하지 않는 별이를 걱정하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잠에서 깨 거실로 나가자, 어제 입고 나갔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소파에 쓰러져 잠들어있는 별이를 마주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 씻고 자-"

"으으..."

용선은 얼굴을 쿠션에 파묻으며 제 손길을 피하는 별이를 힘겹게 돌아눕혔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퍼져오는 지독한 술 냄새에 용선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별이가 입고 잠든 붉은색 윈드브레이커 지퍼를 열고 겨우 한쪽 팔을 꺼냈다.

"자면서 안 불편해?"

"으어어-"

대답을 하는 건지, 투정을 부리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별이의 목소리에 용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한쪽 팔도 겨우 꺼내어 윈드브레이커를 집어 들고 일어섰는데, 안쪽 주머니에서 뭔가 작은 것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소리가 나는 곳을 내려다 본 용선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두 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별이는 김치 수제비가 먹고 싶다고 졸랐다. 밀가루보다는 밥이 낫지 않겠느냐는 용선의 말에도 별이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의 늦은 점심 식탁에는 커다란 김치 수제비 냄비가 놓였다. 별이가 냄비에서 용선 몫의 수제비를 크게 한 국자 퍼 담았다. 용선은 수제비가 가득 든 그릇을 제 앞으로 밀어주는 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게 떨어지는 집요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별이는 제 몫의 수제비를 옮겨 담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열심히 수제비를 떠먹는 별이를 바라보는 용선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대체 그런 게 왜 별이의 주머니에 들어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애할 때도 그런 걸로는 단 한 번도 속 썩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하고 싶지 않은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저와 연애하기 전 별이의 여성편력이 화려했다는 것은 연예계에 조금만 깊게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연애 공개 후에도, 심지어 결혼한 뒤에도 별이를 향한 유혹은 끊이지 않았다. 유명 그룹 여성 CEO의 스폰서 제의라든지, 레즈비언 바의 VIP 고객 제의라든지 하는 것들은 일주일에도 수십 번씩 오는 연락이었다. 심지어 몇몇 연예계 관계자들은, 용선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별이 씨는 이런 데 익숙하지 않아요?'라며 여성전용 클럽이나 바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별이가 단호하게 거절하는 걸 직접 보기도 했고, 주변에서도 그렇다고 전해왔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별이의 결백을 믿고 싶었지만 이건, 이건 좀 아니었다. 이런 것들을 어디에 가야 받을 수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설사 받았다 하더라도, 버릴 수 있는 걸 주머니에 그대로 넣어왔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소 조심성 없는 별이의 성격을 감안하면, 전날 밤 어떤 일이 있었을지 안 봐도 뻔할 뻔 자었다. 결혼한 사람이, 그것도 결혼 상대가 누군지 전 국민이 다 아는 사람이, 본인 직업이 얼마나 올곧은 도덕적 잣대를 요구하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용선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아내를 불렀다.

"여보."

"응-"

"나한테 할 얘기 없어?"

그릇에 얼굴을 묻을 듯 고개를 숙이고 쫄깃한 수제비를 우물거리는 데 온 집중을 쏟아붓던 별이가 고개를 들었다.

"얘기? 무슨 얘기?"

"당신 요새 힘들어?"

"힘들기야 힘들지. 그런데,"

원래 우리 일이 다 그렇잖아, 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어지던 별이의 목소리가, 용선이 주머니에서 꺼내 식탁 위에 내려놓은 물건을 보자마자 뚝 멈춰버렸다.

"그래서 이런 데 갔어?"

라이터였다. 그냥 라이터가 아니라, 성인 안마업소 상호가 붙어있는 라이터였다. 어제 겉옷 안주머니에 넣어놓았던 라이터가 왜 용선의 주머니에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눈앞에 놓인 라이터가 제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라이터를 향해있던 별이의 시선이 용선에게로 옮겨갔다. 용선의 눈동자가 짙은 실망감으로 물들어있었다. 용선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 분노가 아니라 실망이라는 게, 별이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거 내 거 아냐..."

"당신 게 아닌데 왜 이게 당신 주머니에서 나와?"

그러니까 제 것이 맞긴 한데, 그게 또 마냥 제 거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용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거리는데, 용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담배 피우는 거 걸릴 거면 라이터라도 멀쩡한 걸로 들고 다니지 그랬어."

"아니, 그게 아니라,"

"차라리 담배만 피우는 거면 뭐라고 안 해. 스물여덟 먹고 담배 피우는 게 죄도 아니고.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거 명환 선배 거야. 나 담배 안 피워. 그런 업소는 당연히 안 가고."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전에, 별이가 얼른 용선의 말을 잘랐다.

"담배 안 피우더라도 사회생활할 때 라이터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선배가 하나 줬어. 명환 선배가 담배 피우니까 어제 나갈 때 가지고 나간 거고, 난 담배는 입에 대본 적도 없어. 진짜야, 여보."

용선의 오해를 거두기 위해 빠르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별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배우와 현장 스태프들이 흡연자였다. 흡연자가 다수인 상황에서 비흡연자에 대한 배려는 잘 이뤄지지 않았고, 때문에 별이에게까지 자연스럽게 담배 냄새가 밸 수밖에 없었다. 촬영 초반 용선에게 흡연이 자유로운 현장 분위기를 설명해줬고 용선도 이해한다며 별말 없이 넘어갔다. 그런데 매번 담배 냄새를 안고 귀가하던 제가 이번엔 라이터까지 들고 왔으니, 용선이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는 정말 결백했다. 담배를 입에 대기는커녕 손가락 사이에 끼워본 적도 없었다.

며칠 전 촬영장에서, 명환이 라이터를 하나 건넸다. 선배들 담배 피울 때 따라나가서 불이라도 붙여주며 친해지라는 것이었다. 호의라면 호의일 수 있는 그의 조언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가 흡연을 권하는 걸 이미 여러 차례 거절했기에 이번에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대충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별생각 없이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라이터의 존재를 잊고 있다가, 지난밤 그의 호출에 집을 나서며 갑자기 그 라이터가 떠올라 급하게 챙겨나갔던 것이다.

"명환 선배가 왜 그런 데서 주는 라이터를 갖고 있었는지는 나도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그래도 이런 걸 받았으면 당신은,"

"나는 당연히 그런 데 안 가니까."

용선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별이에 의해 가로막혔다. 솔직히 말하면, 명환이 그런 라이터를 왜 가지고 있는지 알았다. 지방 촬영을 할 때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시내 변두리에 있는 인적 드문 술집을 뒤풀이 장소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연배우인 주한과 별이의 경우에는 팬들이 지방 촬영까지 따라오는 경우도 있었기에, 별이도 그게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주차할 곳이 여의치 않아 시내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뒤풀이 장소까지 걸어갈 때면, 매번 사창가를 지나쳤다. 대부분이 남자인 촬영팀 무리가 우르르 지나가면, 남자 포주들이 거리에 나와 호객행위를 했다. 그럴 때면 명환은 매니저를 시켜 포주의 연락처를 받아놓고, 매번 뒤풀이가 끝날 무렵 사창가 건물 어딘가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심지어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늘 주위의 스태프나 배우들을 데려갔다. 숨길 수 없는 죄책감의 무게를 주변 사람에게 나눠 지우기 위함이 아닐까, 하고 별이는 생각했었다.

어쨌든, 누가 명환의 꼬임에 넘어갔는가를 알아맞히는 방법은 매우 쉬웠다. 뒤풀이 다음날 누가 어떤 라이터를 갖고 있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준조연급 선배가 낄낄거리며 말해준 것이었다. 그에게 들은 바로는, 포주나 마담의 안내에 따라 작은방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성과 대화를 시작한다고 했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방 안에 있는 라이터로 손님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모든 일이 끝난 뒤에는 '오빠, 또 와.' 같은 말과 함께 업소 이름이 붙은 라이터를 청바지나 셔츠 안주머니에 넣어준다. 보통 라이터 간수를 잘 하는 흡연자는 별로 없기 때문에 다음날 담배를 피울 때면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들어있는 새 라이터를 사용하게 되니, 지난밤 누가 명환의 뒤를 따라 사창가를 기웃거렸는지 알아차리기란 식은 죽 먹기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명환은 별이에게도 비공식적 2차에 함께할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평범한' 여배우라면 이런 제안은 하지 않았을 거라면서, 이럴 때나 커밍아웃한 덕 보는 거지 또 언제 보겠냐는 몰상식한 멘트까지 곁들이던 명환이었다. 다른 제안이었으면 그저 슬슬 웃으며 돌려 거절했겠지만, 당시에는 끓어오르는 화에 벌게진 얼굴을 겨우 가라앉히며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제 자신이 그런 데에 전혀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조금이라도 용선을 욕보이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제 마음을 용선도 잘 알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신경 안 썼어. 거기 뭐라고 쓰여있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억울함이 묻어나는 별이의 목소리가 얕게 떨리고 있었다. 속상했다. 용선이 저를 완벽하게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용선과 연애한 이후로 단 한 번도 한 눈 판 적이 없다. 제 전적이 어떤지 용선도 잘 알기에, 그래서 더 믿음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이 용선에게 잘 전해졌다고 생각했고, 둘 사이에는 '그런 종류'의 의심은 절대 생길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당신이 나 믿는 거 아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그토록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용선은 저를 불안해하고 의심하는 걸까. 화려한 과거를 지닌 아내가 전과는 다르다는 걸 잘 안다고, 그래서 전혀 불안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 걸까. 별이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착잡한 심정은 도저히 감춰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오해하게 만든 건 맞으니까, 미안해. 앞으로 조심할게."

그래, 의심해도 어쩔 수 없다. 과거에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니까. 제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방식으로 여자를 만나왔는지는 제 자신이 가장 잘 아니까.

"의심해서 미안해."

"아냐, 내가 더 신경 쓸게."

민망함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전하는 아내에게, 별이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용선의 의심과 별개로 제가 용선을 사랑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그 모든 걸 안고 가는 게 맞을 거라고, 별이는 제 자신을 그렇게 위로하기 했다. 평생 의심하면, 평생 해명해주면 되니까. 평생 불안해하면, 평생 안심시켜주면 되니까. 별이에게 용선과의 결혼은 그런 것이었다. 세차게 흔들리는 다리 위에 서있는 용선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 그게 제 인생의 가장 큰 사명이고, 또 행복이라고 믿었다.

"어쨌든, 그래도 이런 라이터는 안 썼으면 좋겠어."

"알겠어. 버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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